'디지털 성범죄란...' 시민에게 배운 판사들

이혜리 기자

법관 30여명, n번방 근절 활동가들과 화상회의

활동가들 “증거인멸 방지 위해 영장 적극적 발부를”

판사 “모른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이젠 자세 달라져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공덕동 서울서부지방법원의 회의실에 4명의 활동가가 모였다.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에 분노한 여성들이 만든 ‘프로젝트 리셋(ReSET)’의 재영·최서희(활동명)씨, 지금은 해산한 ‘DSO(디지털성범죄아웃)’에서 최대 음란물 사이트 소라넷 폐쇄 운동을 벌였던 박수연·백가을씨다. 프로젝트 리셋은 성착취·불법촬영물을 모니터링·신고하고 청와대 국민청원 등을 통해 제도적 변화를 촉구하는 운동을 한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해 최일선에서 활동해온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판사들과 만나기 위해서다.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이 주축인 ‘디지털 성범죄 연구모임’이 활동가들을 초청해 ‘디지털 성범죄 톺아보기’ 화상 간담회를 열었다. 디지털 성범죄에 법원이 지나치게 낮은 형량을 선고해 n번방 사건이 나왔다는 비판이 제기된 상황에서 판사들이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실태를 공부하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지난달 25일 서울 공덕동 서울서부지방법원 회의실에서 열린 ‘디지털 성범죄 톺아보기’ 간담회가 화상회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모습. 회의실에는 진행을 위한 최소 인력만 있었고, 다른 판사들은 스마트폰으로 화상회의 채팅방에 접속해 간담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 연구모임 제공

지난달 25일 서울 공덕동 서울서부지방법원 회의실에서 열린 ‘디지털 성범죄 톺아보기’ 간담회가 화상회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모습. 회의실에는 진행을 위한 최소 인력만 있었고, 다른 판사들은 스마트폰으로 화상회의 채팅방에 접속해 간담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 연구모임 제공

법원 구성은 디지털 문화와 거리가 멀다.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주로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10·20대이지만, 법원은 가장 젊은 판사가 1989년생(31세)인 중년세대 그룹이다. 판사의 75%가 40대 이상이다. 피해자 목소리가 잘 드러나지 않는 디지털 성범죄 재판 구조 속에서 판사들의 무지는 낮은 형량으로 이어지는 한 요인이다.

간담회는 4시간에 걸쳐 화상회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판사 30여명이 참여했다. 법원 내부통신망의 간담회 일정 공지를 보고 참여를 원하는 판사들이 화상회의 채팅방으로 들어왔다. 궁금한 점은 사전에 취합해 활동가들에게 전달했고, 채팅방을 통해 실시간 질문을 받았다.

‘IP와 다크웹은 무엇인가’와 같은 기본적인 개념 정리에서부터 ‘디지털 성범죄의 수단이 되는 애플리케이션 서비스 제공자의 제재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외국에선 디지털 성범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같은 심층적 논의로 이어졌다. 특히 디지털 성범죄는 유죄 판결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성착취·불법촬영물의 삭제·폐기가 중요하다는 점이 큰 주제로 다뤄졌다. 젠더법연구회 판사 인터뷰단이 지난해 말 성폭력 피해자 지원 활동가 ‘마녀(활동명)’를 만난 뒤 젠더법연구회와 형사법연구회에 압수물 폐기에 관한 긴급 문제제기가 이뤄진 상태다.

백가을씨는 디지털 성범죄는 시대적인 문제이고 앞으로도 만연할 것이라고 했다. 범행을 저지르기까지의 문턱이 극히 낮기 때문이다. 백씨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주로 가해자인데 같은 반 친구, 학교 선생님, 교회에서 만난 동생, 명절에 만난 사촌동생, 심지어 엄마와 같은 주위 사람을 대상으로 가해가 이뤄진다”며 “클릭 몇 번만 하면 (영상을) 올리거나 내려받을 수 있어 가담이 쉽지만, 피해자들은 피해에 매우 취약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디지털 성범죄 근절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이 화상회의를 통해 판사들에게 디지털 성범죄 실상을 설명하는 모습. 디지털 성범죄 연구모임 제공

지난달 25일 디지털 성범죄 근절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이 화상회의를 통해 판사들에게 디지털 성범죄 실상을 설명하는 모습. 디지털 성범죄 연구모임 제공

재영씨는 가해자들이 법망을 피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외국의 가상번호, 개설에 개인정보가 필요 없는 메일 주소를 활용해 신분을 감추고, 영상 파일을 아무 내용 없는 파일로 조작해 증거를 인멸하는 경우도 있다. 클라우드는 수사기관의 수사 범위에 거의 포함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재영씨는 “가해자들의 증거인멸 방지를 위해 법원이 구속과 압수수색 영장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발부했으면 한다”며 “원활한 디지털 증거 확보를 위해 법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가 디지털 장의사 업체에 삭제를 의뢰해 양형자료로 제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믿어도 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박수연씨는 “(디지털 장의사가) 3~4개월 단위로 2000만~3000만원 계약을 한다고 한다. 어느 정도 (영상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가 계약이 끝나면 또다시 (영상이) 올라오고 계약을 다시 해야 한다”며 “피해자들은 삭제 방법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돈을 내지만, 피해자 구제에는 실효성이 없기 때문에 양형에 고려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최서희씨는 “(게시물을) 지운다고 해서 피해가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삭제 여부를 양형요소로 삼을 경우엔 지우는 것을 당연하게 하고 지우지 않는 경우를 가중요소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간담회를 진행한 박수현 서울서부지법 판사는 “n번방 사건을 앞에 두고 디지털 성범죄 관련 재판을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박 판사는 “그동안은 ‘모른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면 이제는 ‘몰랐으니까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간담회를 기획했다”며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기회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화상회의 실무를 준비한 이서윤 인천지법 판사는 “재판을 할 때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판단하려 노력하지만,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이거나 피해자와 밀접한 경우가 아니면 전체적인 성착취 구조나 피해자의 심리를 알기 어렵겠다고 느꼈다”며 “활동가들의 입을 통해 실상을 알 수 있었고, 판사들이 잘 모르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도도 높일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공덕동 서울서부지방법원 회의실에서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해 활동해온 ‘프로젝트 리셋’ 등 활동가들이 판사들과의 화상 간담회에 참여하고 있다.      | 디지털 성범죄연구모임 제공

지난달 26일 서울 공덕동 서울서부지방법원 회의실에서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해 활동해온 ‘프로젝트 리셋’ 등 활동가들이 판사들과의 화상 간담회에 참여하고 있다. | 디지털 성범죄연구모임 제공

화상회의 방식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법원 내에 여러 연구회가 있지만 오프라인이 아니라 화상회의 방식으로 간담회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이기도 하지만 소수의 판사만 참여하는 폐쇄적 형태가 아니라 누구든, 어느 장소에서든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간담회를 기획한 판사들이 공감했다. 간담회 이후 “지방 근무자를 포함해 공간을 불문하고 모일 수 있어 좋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간담회 내용은 전국 법원의 판사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법원 내부통신망에 게재될 예정이다.

활동가들은 오는 19일 사법연수원에서 열리는 ‘젠더와 법, 그리고 법원’ 법관 연수에도 강의자로 나선다. 법관 연수는 통상 현직 판사나 교수·변호사 등 법조인이 강의해왔다는 점에서 활동가들이 강의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최서희씨는 이번 간담회에 관해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백가을씨는 “처음 디지털 성폭력 대응 활동을 시작하던 당시엔 모두가 저희가 무엇과 싸우는지 외면했다”며 “마침내 판사들과 만나는 날이 와 감개무량하고, 앞으로도 함께할 일이 많으리라는 생각에 각오를 다지게 된다”고 했다.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