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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68시간 연속 당직 “환자 죽이게 될까 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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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68시간 연속 당직 “환자 죽이게 될까 겁나”

입력
2019.02.25 04:40
수정
2019.02.25 21:32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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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0시간 근무 제한 ‘전공의법’ 유명무실

전공의ㆍ수련의 근무시간을 최대 주80시간으로 제한한 '전공의법' 시행 1년여가 지났지만 근무환경 개선 체감이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게티이미지뱅크
전공의ㆍ수련의 근무시간을 최대 주80시간으로 제한한 '전공의법' 시행 1년여가 지났지만 근무환경 개선 체감이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게티이미지뱅크

“주 168시간. 하루 24시간씩, 일주일 내내 응급실에서 당직근무를 했어요. 오전 7시 출근해 오후 7시까지 기본 업무를 보고,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응급실을 지켰어요. 잠을 못 잔 지 4일째 되니 이명이 생기고 정신도 멍했어요. 이러다가 환자를 살리는 의사가 아니라 죽이는 의사가 되겠구나 싶어 겁이 났죠.”

지난해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 수련의(인턴)로 일한 A(20대)씨 얘기다. A씨의 병원은 지방 분원에서 의무적으로 수련을 하도록 했는데, 당시 지방 분원은 의료인력이 부족해 응급실 밤샘 당직은 전적으로 인턴 몫이었다. 선배들은 “눈치 봐 가며 눈을 붙이라”고 조언했지만, 밀려오는 환자에 경험도 부족한 A씨가 ‘눈치껏 챙길 휴식시간’은 없었다. A씨는 “본원에서도 36시간 연속 근무는 일상”이라며 “잠을 못 자면 환자의 말에 집중이 안됐는데, 환자에게 도리어 짜증을 내는 내 모습이 느껴져서 더 괴로웠다”고 말했다.

지난 1일 인천 가천대 길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레지던트) 2년차 신모(33)씨가 근무 중 숨지면서 전공의 과로 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전공의ㆍ수련의 근무시간을 최대 주80시간으로 제한한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전공의법)’이 시행된 지 1년여가 지났지만 유명무실하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공의법 주요 내용_신동준 기자
전공의법 주요 내용_신동준 기자

◇과로-인력이탈-과로 ‘악순환’

24일 대한전공의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82곳 병원의 수련의ㆍ전공의 평균 근무시간을 설문조사 해보니 주당 79.3시간이었다. 전공의법상 최대 근무시간(주 80시간)에 약 42분 못 미친다.

수련병원들이 전공의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듯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이승우 대한전공의협의회장은 “환자가 줄지 않는데 전공의 근무시간만 줄일 수 없다 보니 일부 병원은 초과근무시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 접속을 차단하고 다른 전공의 명의로 처방을 내리게 하는 등 편법을 쓴다”며 “특히 근무 중 휴게시간은 근로시간으로 봐야 하는데 당직표에서 이를 임의 제외해 근로시간을 줄인다”고 말했다. 전의협은 길병원에서 사망한 신씨의 당직표는 80시간 이하로 법을 지킨 것으로 돼 있지만, 휴게시간을 제외하는 등 실제로는 주당 110시간 이상 근무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전공의 과로는 수술이 많은 외과 계열, 인력이 부족한 비인기과와 지방병원 일수록 상황이 심각하다. 특히 전공의 모집시 병리과나 핵의학과 등은 정원을 채우지 못하기도 한다. 박인서 대한병리학회 홍보이사는 “병리과가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치료 방향을 정할 수 있어 소위 ‘빅5병원’일수록 업무가 많다”며 “개원 후 수익이 많은 과로 전공의 지원이 몰리니 비인기과의 업무가 상대적으로 늘어나고 지원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전공의법 미준수 수련병원 비율_신동준 기자
전공의법 미준수 수련병원 비율_신동준 기자

◇“전공의 과로는 환자 안전에 치명적”

문제는 전공의 과로가 환자 안전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현재 활동의사 10만여명 중 전공의는 1만5,000여명에 달한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 대표는 “대학병원으로 갈수록 환자를 대면 진료하는 것은 전공의”라며 “병원 측이 이들을 교육생으로 보기보다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하다 보니 업무가 과도하게 많고, 환자 안전사고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실제 2014년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지 7시간 만에 사망해 의료사고 논란이 일었던 전예강(당시 9세)양 사건의 경우, 수련의 B씨가 당시 예강양을 포함한 응급실 방문 환자 9명의 혈압, 맥박 등을 모두 동일한 수치로 허위 기재해 1심에서 1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B씨는 법정에서 허위 기재한 이유에 대해 “업무가 너무 많아 힘들어서 그랬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전공의 근무환경 문제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안일한 대처가 문제라는 주장도 나온다. 전공의법 준수여부를 심의하는 수련환경평가위원회 위원 13명 중 교수 및 병원 측 위원이 9명인데 당사자인 전공의 위원은 2명에 불과해 의견 반영이 어려운 구조인데다, 법 위반 시 과태료도 500만원 이하에 불과해 실질적 제재 효과가 없다는 주장이다. 안치현 대한전공의노동조합 노조위원장은 “박능후 복지부 장관이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수련환경평가위 구성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진전된 건 없다”고 비판했다.

복지부가 전공의 대체 인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6년 도입한 입원전담전문의제도도 여전히 시범사업 단계에 머물고 있다. 입원전담전문의를 활용한 병원은 지난달 기준 전국 23곳(98명)에 불과하다. 엄중식 내과학회 수련이사는 “입원전담전문의를 채용하면 전공의보다 월급을 3,4배 더 줘야 하는데 현재 수가는 인건비의 60% 수준이어서 병원이 손해”라며 “수가를 늘려 인건비 보전을 해줘야 제도 정착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곽순헌 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장은 “올해 본사업 전환을 검토 중인데, 적정 수가에 대한 연구용역도 함께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선 △업무 효율화 △인력 추가 채용이 필수인 만큼 의료계의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는 “의사는 노동 강도ㆍ임금이 모두 높기 때문에 다른 직역에 업무를 위임하는 게 전세계적인 경향”이라며 “환자 안전을 위해서도 전공의는 꼭 의사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시키고 진료보조인력(PA)에 업무를 위임ㆍ양성화해야 하는데 의사단체는 이런 논의는 피한다”고 지적했다. 한미정 보건의료노조 사무처장은 “장시간 노동의 근본 원인은 인력 부족”이라며 “의사가 부족하다 보니 업무가 간호사에게 넘어오고, 의료계 전반으로 장시간 노동 문제가 확산되기 때문에 공공의대 정원 확대 등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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