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열흘 사이에 연달아 들린 부고가 이제는 아득히 먼 기억의 저편에서 한 장면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촛불과 탄핵으로 뜨거운 겨울을 지난 봄날이었다. 모처럼의 대선을 앞두고 어떤 설렘과 기대가 사회에 차 있던 때였다. 그렇게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던, ‘나라다운 나라’와 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가득 찼던 때였지만, 우리는 하나의 상징적인 장면을 봤다. ‘나중에’라는 말로 가로막힌 시민의 권리 앞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의 가장 최전선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지개 깃발을 들고 말하려 나섰다가 제지당하고 연행된 이들이 있었다. 나중이라는 외침으로도 변화를 위한 걸음을 결코 멈출 수 없음을 보여준다.

4년이 지났고, 어느덧 바뀐 정부는 임기 말을 맞이했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어떤 시민들의 권리는 끊임없이 유보돼 왔다. 정당한 선발 절차를 거쳐서 얻었음에도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직업의식과 사명감으로 국가를 위해 계속 복무하겠다는 군인은 국가로부터 근거 없이 거부당했다. 원하는 파트너와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행정과 법률, 정치의 영역에서 방치되고 있다. 2007년부터 시도되는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에서는 성소수자 인권은 차별해도 괜찮은 것인 양 말해진다.

여전히 사회에는 성소수자 차별이 넘실댄다. 이제는 경력이 10년 된 정치인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어떤 시민들을 안 볼 권리를 말하면서 차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유력 여당 후보들은 애매하게 넘어간다. 확고한 교육적 신념과 목표를 갖고 이뤄지는 교육에 개인적으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며 비정상을 운운한다. 정치인의 말이 아니어도, 타인의 정체성을 쉽게 폄하하는 차별 발언은 인터넷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나중이라는 핑계를 댈 국회는 이제 없다.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말도, 그 합의를 위한 논의를 만들 생각이 없는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으로 취급하는 정치 앞에서는 허망하기만 하다. 여당이 모든 상임위에서 과반을 점하는 절대 과반 수준 의석을 가진 지 1년이 돼 간다. 5년 전 개혁을 위해 과반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던 국회의원은 장관을 거쳐서 수도의 시장 직에 도전하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말에 조금은 기대를 갖게도 했지만, 정작 시장의 권한으로 보장할 수 있는 성소수자 시민의 권리에 대해서는 아직 답변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 결정은 아직 무력하다. 인권위의 권고를 무시하는 기관장에게는 불이익을 주겠다는 집권 초 대통령 지시사항은 국방부에는 예외인 것인지, 말뿐이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말뿐인 것이 아니었다면, 지금이 바로 그 ‘나중’일 것이다. 이제는 정치가 답을 내놓아야만 한다.

또다시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해야 하고 애도해야 하는 현실에 무력해진다. 끊임없이 싸워 온 이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는 이들이 있기에 늘 변화 가능성을 말하고 싶지만, 변희수 하사의 죽음과 김기홍님의 죽음 앞에 우리는 그 가능성이라는 말부터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마주했던 치열함과 꺼냈던 용기. 그러한 치열함과 용감함이 벽에 부딪힌 것을 보고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이 죽음에 더 깊이 좌절하고 슬퍼하고 있을 동료 시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더 많이 말하는 것으로 위로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으로 연대하고, 다시 나아갈 힘을 모으는 것이 동료 시민으로서의 의무일 것이다. 어쩌면 인권이라는 말과 가장 머나먼 공간에서도 변화의 씨앗이 싹트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했던 그 싸움, 잠시 멈추겠지만 결코 끝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민’이라는 그의 말을 기억하며, 그 모든 용기에 감사와 존경을 담아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우리는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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