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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은 고통 모른다던 美 여성의학… 의학은 중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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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은 고통 모른다던 美 여성의학… 의학은 중립이 아니다

입력
2021.03.25 14:5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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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부인과 의학 발전의 흑역사 추적
노예제도로부터 사실상 '실험체' 공급받아


부인과 질환을 치료하려고 저명한 의사 제임스 매리언 심스를 찾은 흑인 노예들은 주인이 5년간 심스에게 자신을 대여하는 줄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젊은 여성들은 자기가 받는 수술이 지역 백인 주민들에게 공개되는 행사가 될 것이고, 자기 몸이 실험적 수술 대상이 될 것까지는 차마 몰랐을 것이다. 심스 박사는 의사들 십여 명과 ‘5년 동안 이어질 누공 실험을 관찰할 권리’를 주겠다는 계약을 했다. 옷을 벗은 루시는 수술대 위로 올라가 무릎을 끌어안고 누웠고 두 명의 남자 조무사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눌렀다.

미국 여성의학의 눈부신 발전은 노예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의학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은 이렇게 역사를 새로 쓴다. 인종차별적 편견에 사로잡힌 의학이 흑인 여성 노예들을 의료용 실험체로 동원하는 과정을 방대한 사료를 통해서 낱낱이 보여준다.


방광질루 환자를 치료하는 제임스 매리언 심스 박사와 도구들을 묘사한 1862년의 출판물 삽화. 때때로 이러한 실험적 치료는 노예였던 환자의 동의 없이 의사들에게 공개됐다. 도서출판 갈라파고스 제공.

방광질루 환자를 치료하는 제임스 매리언 심스 박사와 도구들을 묘사한 1862년의 출판물 삽화. 때때로 이러한 실험적 치료는 노예였던 환자의 동의 없이 의사들에게 공개됐다. 도서출판 갈라파고스 제공.


19세기 초엽까지 ‘돌팔이’ 취급을 당하던 여성의학이 적절한 대우를 받기 시작한 건 5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미국 의학계는 선발주자였던 유럽을 따돌리고 난소절제술, 제왕절개술과 같은 혁신적 외과수술을 잇따라 성공시켰다. 의사의 신분도 전문기술로 무장한 엘리트 계층으로 수직 상승했다. 의학잡지들이 흥행하고 새로운 치료법이 나날이 개발됐다.

무엇이 그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을까. 노예제도와 의학의 공생에 해답이 있다. 1808년 미국 의회가 아프리카 태생 노예의 수입을 금지하면서 미국 남부의 농장주들에게 흑인 여성의 출산은 중요한 생산수단이 됐다. 이 시기 미국 최초의 여성병원이 앨라배마주의 노예 농장에서 문을 열었다는 사실은 여성 노예의 건강 관리가 지배계급에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는 점을 뜻한다.

실제로 미국 남부는 의료기술 개발에 완벽한 환경이었다. 농장주와 의사들은 ‘고장 난 출산기계’를 수리하면서 실험적 치료법을 활발히 적용했다. 한 환자에게 여러 가지 치료법을 차례로 시험하기도 했다. 치료법이 효과를 보였더라도 환자가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때로는 죽었다. 흑인 여성은 치료를 받는 동시에 철저히 이용됐고, 치료를 거부하거나 적절한 방법을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백인 여성에게는 효과가 입증된 치료법이 시행됐다.


미국 앨라배마주의 작은 노예농장에 세워졌던 미국 첫 여성병원. 이곳에서 제임스 매리언 심스 박사와 노예 여성 9명이 다른 환자들을 돌봤다. 도서출판 갈라파고스 제공.

미국 앨라배마주의 작은 노예농장에 세워졌던 미국 첫 여성병원. 이곳에서 제임스 매리언 심스 박사와 노예 여성 9명이 다른 환자들을 돌봤다. 도서출판 갈라파고스 제공.


의사들의 인종차별적 편견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정당화했다.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보다 생물적으로 열등하면서도 고통은 잘 견딘다는 믿음이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마취가 어려운 시대에 흑인 여성은 맨몸으로 수술을 견뎌야 했다. 백인 남성들이 고통에 뒤틀리는 몸을 붙잡고 눌렀다. 환자가 아파서 몸부림치는데 의사는 고통을 잘 견딘다며 호평하는 기이한 시대였다. 아일랜드에서 이주해온 여성들 역시 의료현장에서 ‘흑인과 비슷하다’는 낙인이 찍혔다. 차별은 ‘백인성’이 떨어지는 모든 약자의 몫이었다.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 디어드러 쿠퍼 오언스 지음ㆍ이영래 옮김ㆍ윤정원 감수ㆍ갈라파고스 발행ㆍ312쪽. 1만6,500원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 디어드러 쿠퍼 오언스 지음ㆍ이영래 옮김ㆍ윤정원 감수ㆍ갈라파고스 발행ㆍ312쪽. 1만6,500원

그러나 책은 현대 여성의학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상기하면서도 지난 시대의 의사들을 악마로 몰지 않는다. 단지 그들 옆에 여성들이 존재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의 첫 여성병원을 열었던 심스가 ‘미국 여성의학의 아버지’라면 ‘어머니’ 칭호는 그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의사 못잖은 임무를 해냈던 여성 노예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묻는다. 의학적 판단이 경제체제는 물론, 당대의 도덕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결혼과 출산, 인공임신중절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몸에 내려지는 의학적 결정은 과연 온전히 당신, 여성을 위한 것이냐고.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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