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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처벌 시대는 끝났다

2020.12.28 03:00 입력 2020.12.28 03:04 수정

이제 나흘 후에는 형법 ‘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상실한다. 동시에 모자보건법 제14조도 의미를 잃는다. 지지와 지원을 위한 입법 없이 12월31일을 맞이하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단지 임신중지를 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처벌하던 형법 ‘낙태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여성들의 용기와 연대, 끈질긴 투쟁이 67년 동안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통제를 당연하게 여기고 순응하지 않는 여성을 형벌로서 다스리던 불평등한 법을 바꿔냈다. 더 이상 ‘낙태죄’는 없다.

그러나 ‘낙태죄’ 폐지는 시작일 뿐이다. 입법을 핑계로 미뤄놓은 과제들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그 어떤 해법도 출발점은 여성들의 삶과 경험이어야 한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나의 외할머니는 3대 독자인 막내아들을 화장실에서 낳으셨다. 딸만 넷을 내리 낳은 할머니는 또 딸이면 그대로 화장실에 빠뜨려 버리려고 했단다.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씨받이’까지 들인 집안의 압박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할머니는 그렇게 홀로 산통을 견디며 출산했다. 다행히 아들이었고 80년도 지난 얘기다.

하지만 모든 출산과 ‘낙태’에는 그 수만큼의 사연이 있다. 모질고 참담한 결정을 둘러싼 삶의 맥락과 구조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수한 숨겨진 이야기도 중요하다.

‘낙태죄’ 폐지 이후 새로운 세상을 위한 대안 마련의 출발점은 명확하다. 임신과 임신중지, 출산을 둘러싼 여성의 경험과 삶의 맥락을 살피고 그 지점으로부터 출발을 해야 근본적인 해결로 나아갈 수 있다.

입법을 통한 권리 보장이 더 확실하고 좋지만 입법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은 많다. 정부는 입법이 안 되었기 때문에 임신중지를 할 수 없다는 오해를 불식하고 임신중지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의료법에 의한 진료거부 금지 강조 등 가이드라인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조속한 건강보험 적용을 통해 안전한 의료서비스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빠르게 임신중지약물 적용 방안도 내놓아야 한다. 임신중지약물 도입 지연은 순전히 정부의 직무유기 탓이다. 모자보건법에 따라 합법 영역이 있고 여성에게 진보한 과학기술에의 접근권을 보장하라는 국제기구 권고도 있었다. 정부 태만의 책임과 부담을 여성이 지는 것은 부당하고 또 부당하다. 의료접근권 보장을 위한 인적·물적 인프라와 시스템도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가장 필요한 것은 임신중지 여성에 대한 혐오와 낙인, 우리 사회 인식에 대한 성찰이다. 혐오와 낙인으로는 임신중지율을 낮출 수 없다. 폭력을 부를 뿐이다. 부도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임을 인정하고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처벌과 규제가 필요하다는 낡은 주장이 다시 등장할 수 없다. 그래야 ‘낙태죄’가 사라진 자리에 채워야 할 것들을 볼 수 있다. 처벌의 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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