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인 대만 TSMC는 관세만큼이나 물 부족과 전기 요금을 걱정했다. TSMC가 최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지난해 실적 관련 보고서(20-F)에는 ‘물’이라는 단어가 29번, ‘전기’라는 단어가 21번 등장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정책으로 세계를 뒤흔들고 있지만, ‘관세’(15번·전기 요금이라는 뜻으로 쓰인 ‘tariff’는 제외)보다 물 부족과 전기 요금이란 표현이 더 많이 등장할 정도로 우려가 큰 셈이다. 가뭄이나 전기 부족은 TSMC의 반도체 생산 공정을 마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막대한 양의 전기와 물을 필요로 한다. TSMC는 “정부의 에너지 정책 변화나 (TSMC 공장 인근에 위치한) 다른 제조업체들의 성장,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가뭄 등으로 인해 충분한 전기 및 수자원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고 했다. TSMC는 꾸준히 오르는 대만 내 전기 요금에 대해서도 부담감을 드러냈다. WEEKLY BIZ는 TSMC의 20-F와 최근 5년간의 실적 자료를 통해 TSMC를 위협하는 ‘위험 요인’에 대해 살펴봤다.
◇물 관련 언급 20번에서 29번으로
지난 17일 SEC에 제출된 TSMC의 지난해 실적 관련 보고서 20-F에 물이라는 단어(지하수 포함·오수 제외)는 전년도(20번)보다 9번 더 쓰였다. 수자원이 그만큼 반도체 공정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미국변호사협회·세계경제포럼 자료 등을 보면 TSMC의 반도체 제조 공장 한 곳에선 하루에 물을 890만갤런(약 3400만L) 쓴다. 3만 가구 이상의 물 소비량과 맞먹는 수치다.
TSMC는 “기후변화로 가뭄과 같은 극한 기상 현상이 나타나고, 이런 기후에 대응하기 위한 (급수 제한과 같은) 정부의 조치들은 TSMC의 운영이나 (부품) 공급 업체의 생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TSMC는 또 “이러한 상황(극단적 가뭄)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 회사의 운영이나 재무 상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도 했다.
전기 요금 인상 역시 TSMC 측이 부담을 느끼는 부분이다. TSMC는 “(대만 내) 전기 요금 상승은 제조 비용 증가로 이어져 재무 성과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지난해 4월 전기 요금이 25% 인상됐고, 같은 해 10월에 또 14% 추가 인상됐다”고 했다. TSMC는 실적 관련 자료 곳곳에서 “비싼 전기 요금은 회사의 수익을 감소시키는 요인”이라고 언급했다.
◇관세 언급도 두 배로 늘었다
TSMC는 “지난 1분기에 미국 정부의 관세 정책에 따른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고 했다. 웬델 황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실적 관련 보도자료에서 “(관세가) 우리 고객사의 영업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은 아직까지 관찰되지 않았다”고 했다. 트럼프는 지난 1분기에는 대만 혹은 반도체를 표적으로 삼은 관세 정책을 발표하지 않았다. 2분기 들어 최근까지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는 상태다. TSMC는 20-F 보고서에서 “지난 2일 트럼프가 교역 상대국을 대상으로 차등적 상호 관세(대만은 32%)를 발표했다가 7월 9일까지 유예했다”며 “반도체는 일단 상호 관세 부과 대상에 포함되진 않았다”고 했다.
다만 최근 제출된 지난해 실적 관련 20-F 보고서에선 관세 관련 언급이 15번으로 지난해 4월 제출된 2023년(6번)의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그만큼 불안감이 커졌다는 얘기다. TSMC는 특히 관세 정책의 ‘불확실성’ 때문에 떨고 있는 분위기다. TSMC는 “미국이 부과하는 관세의 범위와 수준, 특히 반도체 제품에 대해 부과하는 관세에 대해서는 상당 수준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웨이 회장은 실적 발표회에서 ‘미국과 대만의 관세 협상에 TSMC도 관여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관세는 국가 대 국가로 협상을 하는 사안이다. 우리는 민간 기업이기에 협상 과정에 관여하지도 않고 협상 결과를 존중하고 받아들일 뿐”이라고 했다.
◇“대중 수출 규제 변화도 면밀히 살펴”
TSMC 경영진은 실적 발표회에서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 정책에 대해선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을 이어갔다. 지난 15일 트럼프는 엔비디아의 저사양 인공지능(AI) 가속기인 H20의 대중 수출을 무기한 규제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한 질문에 웨이 회장은 “우리는 특정 고객사의 제품에 대해 직접적인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면서도 “올해 한 해 전체의 실적 전망을 내놓는 과정에선 이러한 수출 규제 영향도 충분히 고려했다”고 했다.
TSMC는 미국이 중국을 더 옥죄기 위해 수출 통제를 더욱 강화하게 되면 중국 난징에 있는 TSMC 생산 시설이 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한다. TSMC는 20-F 보고서에서 “2018년부터 세계 주요 경제 대국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무역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며 “여기에서 파생되는 관세, 비관세 장벽, 제재, 수출 통제와 그 외의 조치들이 언제든 반도체 산업과 그와 관련된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애리조나 공장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TSMC는 ‘지리적 생산 유연성’을 강조하며 생산 시설을 세계 각지로 분산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미국(애리조나), 일본(구마모토), 독일(드레스덴) 등에 신규 팹(반도체 생산 시설)을 건설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총 1650억달러가 투자되는 애리조나의 생산 시설이 가장 주목받고 있다. 웨이 회장은 지난달 3일 트럼프 앞에서 “애리조나에 추가로 100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TSMC는 애리조나에 총 6개의 팹을 건설해 운영하려고 하고 있는데, 웨이 회장은 실적 발표회에서 “애리조나의 생산 시설을 독립적인 최첨단 반도체 제조 클러스터로 만들겠다”고 했다. TSMC의 반도체 용처별 매출 비율에서 첨단 반도체 수요 급증 흐름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선폭(線幅)이 7㎚(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인 첨단 반도체가 TSMC의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21년 1분기 49%에서 2023년 1분기 51%로 성장세가 완만했지만 지난해 1분기(65%)와 지난 1분기(73%)엔 이 비율이 큰 폭으로 올랐다. 반도체 앞에 붙어 있는 ㎚는 회로 선폭의 단위다. 선폭이 좁을수록 집적도가 높아져 반도체 성능이 좋아진다.
웨이 회장은 “애리조나의 팹이 2㎚ 반도체 생산의 30%를 담당하게 될 예정”이라며 “아직 구체적인 논의 전이지만 2㎚ 반도체 생산이 이뤄진 다음에는 1.4㎚, 1㎚ 반도체 생산이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웨이 회장은 또 미국 고객사들의 자사 의존도가 높은 만큼, 현지 생산 시설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기업인) 애플, 엔비디아, AMD, 퀄컴, 브로드컴의 AI 반도체 수요(생산 요청)가 많다”고 했다. 실제로 분기 운영 보고서를 보면 미국을 포함한 북미 지역의 매출은 2023년 1분기 전체 매출의 63%에서 지난 1분기엔 77%까지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