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의 고통에 이름을 붙이면 달라지는 것들

유명종 PD

“노동자의 고통에 이름을 붙인다는 건 노동의 문제를 드러내는 첫 과정이었습니다. 소중한 생명이 태어나면 이름을 짓잖아요. 그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비로소 공식적인 사회 시스템의 적용을 받게 됩니다. 노동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체가 드러나야 관심이 시작됩니다.”

청소 노동자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그들이 정확히 어떤 노동을 하고 있는지 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급식 조리사들 역시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택배 노동자가 하루 열다섯 시간씩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들을 눈으로 보는 것은 택배가 도착하는 찰나일 뿐이다. 우리의 일상과 접해있는 노동이지만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노동자들의 환경과 건강 실태를 조사하고, 그들의 고통을 찾아 이름을 붙여 세상에 알리는 일을 20여 년째 하는 곳이 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다.

노동자들의 고통에 이름을 붙이면 달라지는 것들

팔을 사용해 일하는 노동자에게 “팔을 많이 쓰면 아픈 것이 당연하지 그게 무슨 병이냐”고 되묻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이름 없는 ‘골병’이라고 불렀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다양한 직종의 ‘골병’을 조사하기 시작한 곳이다. 해외에서만 쓰이던 ‘근골격계질환’이란 용어를 번역해 국내에 들여와 ‘근골격계질환’이라는 직업병을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질환의 심각성이 알려지면서 정책적으로 문제 제기가 가능해졌고 2002년 근골격계질환 예방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관절 부위에 나타나는 질환은 모두 산재 신청 대상이 된 것도 이때부터다. 사업주가 예방을 위한 조치와 의학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 의무도 생겼다. 근골격계질환자는 이름이 붙고 점점 증가해 2011년 약 5,000명에서 2020년 2배가량 증가한 약 1만명에 이른다. 고통이 가시화된 효과다.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사무처장은 “김용균이 발전소 담벼락 안쪽에서 사망을 했는데 우리에게는 그곳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생산한 전기를 쓰고 빛을 볼 뿐”이라며 “하지만 연구소에서는 보인다. 전국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일하는 모습, 노동 과정을 보며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름을 붙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2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 발착장에서 한 집배원이 구멍손잡이 소포상자를 택배차량에 싣고 있다. 소포상자 구멍손잡이는 운반편의를 위해 만들었다.  / 이준헌 기자

지난해 11월 2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 발착장에서 한 집배원이 구멍손잡이 소포상자를 택배차량에 싣고 있다. 소포상자 구멍손잡이는 운반편의를 위해 만들었다. / 이준헌 기자

상자를 운반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허리를 숙이는 마트 노동자들의 고통은 ‘착한 손잡이’를 만드는 운동으로 이름을 붙였다. 상자에 손잡이를 뚫는 과정은 대대적인 실태 조사로 시작됐다. 노동자들의 고통을 모아 캠페인을 벌이고 토론회를 했다. 국회에 정책을 제안하고 1년이 지난 2020년, 마침내 상자에는 손잡이 역할을 하는 구멍이 뚫렸다. 노동자들의 허리에 가중되는 부담이 10%가 줄었다. 서서 일하는 판매 노동자의 고통은 ‘휴식 의자’로 대응했다. ‘피자 30분 배달제 폐지’ ‘환경미화원에게 씻을 권리 제공하기’ ‘감정 노동’ ‘직업성 암 환자 찾기’ 등 모두 노동자의 고통을 찾아내 눈에 보이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때 해결을 위한 첫걸음이 만들어졌다.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은 “새롭게 명명하거나 학술적으로 이름을 붙인다는 건 큰 의미가 없다”며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찾아내고 사회적으로 알려 변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난 뒤 드러난 것은 차별이다. 구의역에서 김군이 사망했던 당시 서울 지하철은 1~4호선과 5~8호선의 스크린 도어 유지보수 업무가 이원화돼 있었다. 김군이 일했던 1~4호선 업무와 달리 원청업체에서 담당했던 5~8호선은 단 한 명의 부상자와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하청업체가 담당한 1~4호선 유지보수 업무는 처리 속도가 느리면 페널티를 받는 규정이 있었다. 2인 1조가 출동해야 하는 원칙은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함께 현장에 나갈 동료를 기다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반면 원청은 늦더라도 규정에 맞춰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보고나 처리의 단계도 달랐다. 보수가 진행 중일 때 열차를 주의해서 운전해 달라는 요청을 하려면 원청은 “작업자들이 들어가니 열차를 천천히 보내달라”고 관련 부서에 직접 말할 수 있지만 하청업체는 여러 보고 단계를 거쳐야만 업무 협조를 받을 수 있다. 한인임 사무처장은 “원청에선 안 죽을 수밖에 없고 하청은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2016년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을 하던 노동자 김모 군이 전동차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은 31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현장에 매달려 있는 추모의 국화꽃.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2016년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을 하던 노동자 김모 군이 전동차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은 31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현장에 매달려 있는 추모의 국화꽃.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목숨의 가치에도 차별이 존재했다. 이 소장은 “김용균 특조위 때 현장을 조사했는데 하청 업체 노동자가 사망하면 벌점이 4점, 원청업체 정규직 노동자가 사망하면 벌점이 12점이라는 신분별 감점 계수 지표가 있었다”며 “임금뿐 아니라 사고를 당한 노동자를 평가해 목숨 값에도 차별을 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의 차별은 어떻게 해야 사라질까 한인임 사무처장은 “노동자의 고통을 드러나게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 소장은 “건설 노동자를 보면서 부모가 ‘공부 안 하면 저런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며 “노동을 바라보는 이 같은 시선이 존재하는 한 건설 노동자의 직업병이나 안전에 누가 관심을 갖겠느냐”고 했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노동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이 고통스럽고, 위험한지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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