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도시 공간’ 제언, 유현준 교수 “사람 많이 모일수록 좋은 도시란 공식 끝났다”읽음

김희진 기자
유현준 홍익대 건축도시대학 교수(유현준건축사무소 대표 건축사)가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유현준 홍익대 건축도시대학 교수(유현준건축사무소 대표 건축사)가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공간 쪼개고 중심지 여러 개로 다변화하는 ‘다핵구조’ 도시 필요
‘100만권’ 도서관보다 1만권짜리 도서관 100개 만드는 게 낫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도심은 여러 개의 부도심으로, 밀집구조는 다핵구조로 바꾸는 ‘공간’ 자체의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지난 5일 유현준 홍익대 건축도시대학 교수(유현준건축사무소 대표건축사)는 강남구 논현동 소재 본인 사무실에서 진행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이 모일수록 좋은 공간이라는 도시의 근본 공식이 흔들렸다. 코로나19를 계기로 공간 구조가 재편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유 교수는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디서 살 것인가> 등 저서에서 인문학적 시각으로 도시와 건축을 해석해왔다. 그는 공간이 사람들 사이 관계를 조정하고,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본다.

유 교수의 관점은 공교롭게도 코로나19라는 재난으로 ‘입증’됐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제약되면서 우리의 삶과 사회가 변했다. 밖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시간이 더 길고, 손소독제, 재난문자, 입구마다 놓인 QR체크인은 일상이 됐다. 사무실 대신 재택근무와 공유 오피스가, 헬스장 대신 산과 공원이, 학교 대신 온라인 화상수업이 익숙해졌다. 한 번 바뀐 일상의 공간은 코로나19 이전 모습으로 돌아갈까. 당연하게 여겨온 집과 사무실 등 공간은 어떻게 달라질지 유 교수에게 물었다.

그는 먼저 “서울에는 사실상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다”며 “도시 공간의 설계가 잘못됐다”고 짚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마음놓고’ 머물 공간이 적다는 것이다. 그는 “한강 시민공원 등을 제외하면 서울에 공적인 정주공간이 거의 없고, 앉아서 쉴 수 있는 단위면적당 의자 개수도 해외에 비해 현저히 적다”며 “대신 PC방, 노래방, 모텔, 카페 등 값을 지불하고 잠시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발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같은 환경은 코로나19 확산의 주요 원인이 됐다. 머물 공간이 마땅찮은 사람들이 PC방과 카페로 모여들었고, 주말이면 한강공원과 주변 산으로 인파가 몰렸다.

이 때문에 도시 공간 설계가 ‘다핵구조’로 바뀌어야 한다고 유 교수는 강조했다. 공간을 쪼개고 중심지를 여러 개로 다변화해야 한단 뜻이다. 감염 위험은 줄이고 접근성은 높이는 방법이다. 과거에는 상업지구를 지정하거나 대형건물을 세워 사람을 최대한 밀집시키는 게 관리·통제 차원에서 효율적이었지만 전염병에 취약한 구조라는 게 드러났다. 유 교수는 “예컨대 책 100만권을 소장한 큰 도서관 하나를 짓는 것보다 1만권짜리 도서관 100개를, 1만평짜리 공원 하나보다 1000평짜리 공원 10개를 만드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다핵구조로의 공간 변화가 커뮤니티 발달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유 교수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익명성을 가진 채 모여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공간이 앞으로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소셜믹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아 계층을 구분짓고 차별을 일삼는 상황이 벌어지기 쉽다”며 “대신 도서관, 운동시설, 공원 등 사람들이 자유롭게 섞여들 수 있는 공적 공간은 다양성을 확보한 소통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상업시설의 빈 공간을 활용해 도시 내 부족한 주거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제안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오피스나 가게 공실이 늘었다”며 “빈 곳들을 주거공간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부도심이 여러 개로 구성된 도시 공간 구조로 재편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한국감정원이 발표한 2020년 3분기 상업용 부동산 임대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12.4%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소규모 상가 공실률은 6.5%였는데, 이태원은 30.3%, 명동은 28.5%에 달했다.

코로나19 이후 주거 공간에 대해선 실내 공간 확장을 이유로 요즘 보기 드문 발코니나 테라스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유 교수는 “코로나19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155% 정도 늘어났는데 1.5배 정도 공간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라며 “쓸모없는 가구를 버리거나 사적이면서도 외부와 접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발코니·테라스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신축 아파트는 테라스를 만들면 서비스 면적을 제공하는 건축법이 이미 적용되고 있다”고도 설명했다.

유 교수는 코로나 이후 ‘지하 물류터널’이 도시의 필수시설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현재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물류센터 저장고 면적이 계속 늘어난다는 점”이라며 “오프라인 상거래와 상업시설이 줄어드는 추세가 유지되면서 배달 물류량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안으로 그는 로봇이 택배 배달을 하는 지하 물류터널을 제시했다. 유 교수는 “소음과 냄새, 이동거리를 고려하지 않은 ‘드론택배’보다 현실성이 높다고 본다”고 밝혔다. 유 교수는 “5000년 인류 역사상 상수도와 하수도, 전깃줄, 지하철 등 모든 서비스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로 들어갔다”며 “물량이 계속 늘어나면 도로를 차지하는 교통량이 늘어나는 등 비효율이 커지므로 지하에서 이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인류의 문명과 도시, 전염병은 항상 ‘한 세트’였다고 유 교수는 지적한다. 유 교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과거에는 없던 수준의 건물과 공간 종류가 나타나야 한다”며 “역사가 보여주듯 이미 코로나19에도 경쟁력을 갖추려는 도시 공간을 개발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공간은 사회 구성원의 관계와 생각을 변화시키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며 “코로나19를 계기로 한국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공간을 고민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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