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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본기’를 몸으로 익히는 공간, 알로이시오기지1968 (1)
디자인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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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3. 5:30
알로이시오기지1968. 이곳에서는 공동체, 자연, 감각, 침묵들을 생각한다. 특히 도심에서의 달빛 맞이와 맨발 활보는 빼놓을 수 없다. © 윤준환
공간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사용자의 움직임이 달라지면 그를 수용하는 프로그램도 변화한다. 지난 2월 25일 개관한 알로이시오기지1968은 폐교된 시설을 ‘더불어 나누는’ 곳으로 탈바꿈한 장소다. 목공, 요리, 제빵, 공예, 수경재배 등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맨발로 활보하며 달빛을 맞이하기도 한다. 때로는 빈둥거리고, 때로는 침묵한다. 건축가는 이곳의 모든 공간을 열었고 길을 이었다. 오감과 기억을 담았다. 자연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도록 설계하며 한국의 오래된 정서를 담았다. ‘기지’는 1968년 개교하여 알로이시오 중·고등학교로 쓰였던 건물이다. 소 알로이시오Aloysius Schwartz 신부님이 전쟁고아들의 참혹한 현실을 돕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50년간 가난한 아이들의 학교로 사용되었지만 쓰임을 다해 문을 닫았다. 마리아수녀회와 건축사사무소 오퍼스(대표 우대성, 조성기, 김형종)는 이곳에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한다. 콘크리트를 걷어 흙을 살려 텃밭을 만들고, 태양 빛과 빗물을 모아쓴다. 망망대해의 버팀목이자 피난처와 같은 기지基地에서 ‘삶의 기본기’를 익히도록 만드는 것이 이들의 미션이다. 설계를 맡은 우대성 건축가는 “집을 짓는 이에게 건축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지만, 기지 프로젝트는 집을 짓기 이전에 필요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고 말한다. 공간의 쓰임과 방향을 정의하고, 공감하며, 기획하는 일. 건축가가 여기에 에너지를 쏟은 시간은 자그마치 8년이었다.
대지 면적 14,591㎡의 땅에 건물 3개 동으로 구성된다. (왼쪽에서부터) 그대로 둔 집, 1개 층만 남겨 누마루를 올린 집, 완전히 고친 집으로 이루어진다. 한꺼번에 고치지 않고 단계를 나누어 느슨하게 채워가는 것은 수녀회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 윤준환
Interview 건축가 우대성 (건축사사무소 오퍼스)
기획에서 준공까지의 과정이 굉장히 길다. 무엇을 고민했나? 한국 출산율은 점점 떨어진다. 아동의 숫자는 줄어든다. 충분히 폐교가 예측되는 상황이다. 여기에 대한 고민이 2013년부터 시작됐다. 학교가 소멸하면 이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왜 하는가. 그 궁금증이 프로젝트의 발단이었다. ‘어떻게’는 다음 단계의 일이다. ‘무엇을’과 ‘왜’에 관한 물음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었다. 마리아수녀회는 그동안 정부의 도움 없이, 국가가 하지 않는 일들을 해왔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해서다. 한국에서 50년 동안 1만 8천 명가량의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독립시켰다. 필리핀, 멕시코, 브라질, 과테말라, 온두라스, 그리고 탄자니아까지 셈한다면 20만 명에 이른다. 가늠이 안 되는 숫자다. 국가도 기업도 아닌 수녀회가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에 관한 답을 내리기까지는 밀도 높은 고민의 시간이 수반되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각각 2016년과 2018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다.
공간이 자리한 부산 서구 암남동에는 알로이시오가족센터, 놀이터, 수국마을, 힐링센터 등이 함께 모여 있다. 가난한 아이들의 자립을 위해 50년간 이어온 마리아수녀회의 활동으로, 우대성 건축가도 관여하며 설계를 담당하고 있다. 알로이시오기지1968은 도로변에서 진입하는 입구부터 뒷산까지 경사가 심해 이를 건축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 윤준환
국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서 ‘무엇을’, ‘왜’ 하고자 했나? 결론은 ‘삶의 기본기’였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교육이 아닌, 진짜 기본기를 가르치는 곳. 일반적인 교육 시스템의 지향점과는 전혀 다르다. 기지의 모토는 ‘더불어 나누는 곳’이다. ‘삶의 기본기’가 뜻하는 바는? 의식주다. 하지만 배움이 목표는 아니다. 주방과 식당의 구조가 주택과 비슷한 이유다. 삼시 세끼 자신의 밥을 해 먹고 친구와 나눈다는 데 의의를 둔다. 운동장이 있는, 넓고 오래된 학교 건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그 무엇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 살며 놓친 감각을 일깨우는 경험이다. 현대 주거공간은 마당을 잃어버렸고 21세기 도심은 어둠을 잃어버렸다. 집에서 자연을 체득할 기회가 사라졌다. 알로이시오기지1968에서는 맨발로 활보하며 도심 속 자연을 느낀다. 바닥도 온돌이다. 삶의 기본기를 오감으로 익힌다.
빵 굽는 수녀님, 나무 공방, 메이커스 랩, 음악활동실, 사랑방, 도서관, 수직농장 등 다양한 활동이 펼쳐지는 알로이시오기지1968. 프로그램은 각양각색이지만 더불어 나눈다는 기조는 변하지 않는다. © 윤준환
그래서인지 기지에 들어서면 빵 냄새가 방문자를 반긴다. ‘빵 굽는 수녀님’ 브랜드의 천연 빵인데, 두산 박용만 회장이 노숙인들의 건강한 한 끼를 위해 개발한 레시피다. 그동안 배움의 공간에 다니며 유쾌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향긋한 냄새가 나면 좀 더 기분 좋아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마음에서 입구를 자리로 잡았다. 뿐만 아니다. 기지에 도착하면 휠체어를 타고 내부 경사로를 따라 5층 꼭대기까지 한 바퀴 돌아야 한다. 프로그램 필수 코스다. 몸이 불편한 사람도 우리와 같이 살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과정이다. 실제로 해보면 상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머리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으로 경험하는 학습이 필요하다. 건축 언어가 굉장히 명료하다. 비우고 잇는 것이 핵심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머무는 아이들이 3천 명이었다. 이제는 600명 남짓이다. 넓은 면적을 전부 활용하기보다는 기분 좋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건물 3동 중 중간 건물을 비워 숨통을 열었다. 또한, 기존 건물은 입구 여러 개가 흩어져 있는 산만한 환경이었다. 기지 초입에서 운동장까지의 단차는 25m다. 이를 이어 하나로 작동하도록 ‘연결’해야 한다는 건축적 숙제가 있었다. 제일 먼저 운동장과 건물을 이었다. 내부 중심에는 사회적 약자도 쉽게 오갈 수 있는 경사로로 길을 냈다. 집 사이에는 계단을 설치하며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했다.
대청마루 앞, 주차장으로 쓰이던 아스팔트를 걷어 텃밭을 만들었다. 두 건물을 잇는 계단실은 밤이 되면 마치 등대처럼 은은한 불을 밝히며 안온한 느낌을 선사한다. © 윤준환
숨통을 열고 건물을 비운 자리에 ‘한국식 대청마루’를 둔 이유가 있나? 기능이 고정되지 않은 현대식 만대루晩對樓가 있기를 바랐다. 쓰임은 사용하는 사람이 정한다.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도 있다. 함께 모여서 떠들어도, 혼자서 뒹굴뒹굴해도 좋은 공간이다. 면적과 예산을 고려하면 엄청난 낭비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단연 ‘필요하다’고 답할 것이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과 공간은 몸도 마음도 빈둥거릴 여백이 아닐까? 나의 희망 사항을 말하자면 이곳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면 정말 좋겠다. 낡고 오래된 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하며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부분은? 일반적인 학교는 복도를 기준으로 교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배치를 보인다. 완벽하게 획일화된 건물이다. 사용자는 모두 다른데 똑같은 교육을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커리큘럼으로 받는다. 새로 바뀌는 공간은 학교가 아니다. 강박일 수도 있겠지만 획일성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로이시오기지1968의 모든 공간은 전부 다르게 만들어졌고 서로 이어졌다. 개개인이 다르고 세상이 연결된 것과 같은 이치다. 말은 쉽지만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알로이시오는 마리아수녀회 창설자의 이름에서, 1968은 개교한 해에서 가져온 명칭이다. ‘기지’는 어떠한 의미인가? 전진 기지, 말 그대로 베이스캠프다. 광활한 남극 땅을 밟은 탐험가에게 베이스캠프는 존재만으로 의지가 되는 거점이다. 이곳이 스스로의 생각을 키우며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근거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지라 명명했다.
‘휠체어 타고 경사로 한 바퀴 돌기’는 기지의 필수 코스.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또한 더불어 살아야 할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층마다 다른 색상과 재료가 입혀진 까닭은 획일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건축가의 뜻과 같다. © 건축사사무소 오퍼스
시공 경성리츠(건축) 신태양건설(전기) 동진정보통신(통신) 태양설비공영(소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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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디자인프레스 정인호 기자 (designpress2016@naver.com)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건축사사무소 오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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