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차별하는 '홀수와 짝수의 세계'…인권위, 국가차원 첫 실태조사

오경민 기자

“귀하의 성별은 무엇입니까?” 선택지는 여자, 남자뿐이다. 1·3, 2·4로 시작하는 주민번호 뒷자리, 남성과 여성 인포그래픽으로 안내된 화장실 등은 ‘성별이분법’의 상징이다. 남과 여, 두 성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홀수와 짝수의 세계’에서 트랜스젠더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애 주기마다 심각한 차별에 직면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9일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를 통해 트랜스젠더는 가정, 학교, 직장, 군대, 병원 등 모든 장소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는 국가 차원의 첫 트랜스젠더 실태조사로 국내 연구 가운데 최대 규모인 591명의 만 19세 이상 트랜스젠더가 참여했다.

출생시 지정받은 성별이 남성이고 성별 정체성이 여성인 ‘트랜스여성’ 참여자는 189명(32.0%), 지정 성별이 여성이고 성별 정체성이 남성인 ‘트랜스남성’ 참여자는 111명(18.8%)이었다. 자신을 여성 또는 남성으로 확고히 정체화하지 않는 ‘논바이너리’도 291명(49.2%) 참여했다.

트랜스젠더는 신분증을 요구하는 모든 곳에서 불편을 겪고 있다. ‘남자 혹은 여자가 맞느냐’는 질문 등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자 중 193명(34.8%)은 “일상적 용무를 포기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중 가장 많은 이가 방문을 꺼리는 곳은 의료기관이다. 119명(21.5%)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봐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박한희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성별 정정을 안 한 상태에서 진료 접수를 할 때 주민번호를 불러주면 다 들리게 ‘남성이 맞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며 “안과나 치과 같이 성별 구분이 필요없는 곳에서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병원에 가기 어려워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공적마스크 구입 시 신분증을 제시해야 했던 지난해 봄에 “마스크 구입이 어려웠다”고 답한 이들도 86명(14.6%)이나 됐다.

최근 5년 간 구직 경험이 있는 트랜스젠더 응답자 469명 중 268명(57.1%)은 정체성 문제로 구직 포기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입사 취소나 채용 거부를 경험한 이들도 74명(15.9%)이나 됐다. 외모, 복장, 말투, 행동 등이 남자 혹은 여자답지 않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주민번호에 나타난 성별과 자신의 외모 성별 표현이 일치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호림 고려대학교 보건과학과 박사과정 연구원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과정부터 겪다보니 비정규직이 많거나 소득이 낮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번 조사에서도 월평균 임금이 “없다”고 답한 참여자가 326명으로 전체 참여자의 55.4%로 나타났다. ”100만원 미만”과 “100만~200만원”이라고 답한 참여자는 각각 77명(13.1%)과 97명(16.5%)을 차지했다.

학교 역시 트랜스젠더가 배제되는 공간이다. 중·고등학교를 다닌 참여자 584명 중 539명(92.3%)은 “학교 환경이나 제도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원인은 성소수자 관련 성교육 부재(69.2%), 성별 정체성에 맞지 않는 교복 착용(62.3%), 성별 정체성에 맞는 화장실·탈의실 부재(각각 51.7%·45.9%)등으로 다양했다. 교사로부터 성소수자 비하 발언 들은 이들도 67%에 달했다. 트랜스젠더들이 가장 시급하게 제도 개선이 필요한 영역으로 꼽은 것도 ‘초·중·고 교육 과정’이었다. 해당 질문 응답자(중복 답변 가능)의 97.3%인 574명이 성별 이분법적 교육 과정이 문제라고 답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부재(96.4%)나 의료 트랜지션(자신이 원하는 성별 표현을 위해 받는 의료 조치) 관련 국민건강보험 미적용 개선(96.3%)보다 많았다.

트랜스젠더들은 과도한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응답자 중 451명(76.7%)은 “사람들이 내 성별 정체성을 제대로 인지하게 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사람들이 나의 성별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나는 ‘과하게 남성적’이거나 ‘과하게 여성적’이어야 한다”고 말한 이들도 278명(47.2%)이었다. 이혜민 고려대 보건과학과 박사과정 연구원은 “연예인 하리수씨가 광고에 나왔을 때도 카피가 ‘여자보다 더 예쁜’ 이었다”면서 “하리수씨를 여성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동시에 여성이라면 가늘고 여리여리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씌운 것”이라고 말했다. 책임연구자인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성별이분법이 강한 사회, 트랜스젠더 혐오가 심한 사회일수록 스스로 ‘나는 내가 표현하려고 하는 성별이 맞다’고 입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국내에서 트랜스젠더 인권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는 공백 상태다. 국내 제도 중 트랜스젠더를 직접 다루는 것은 대법원의 호적 예규 제716호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이 유일하다. 홍 교수는 “성별 정정 사건이 법원에 쏟아지니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것”이라며 “법원이 인권의 보루 역할을 제한적으로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법률의 형태로 국회가 기존의 독소조항을 뺀 성별 정정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가 의료 트랜지션이나 법적 성별정정에 대한 공식적인 정보를 얻을 창구도 전무하다. 안전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병원도, 성별 정정에 필요한 절차나 서류도 알 수가 없다. 인권단체들이 협업해서 운영 중인 ‘트랜스로드맵’ 사이트에서 일부 정보를 제공하지만 민간단체라 한계가 있다. 대부분 트랜스젠더들은 지인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관련 정보를 얻고 있다.

전국에 트랜스젠더가 몇 명인지 역시 아무도 모른다. 법적 성별 정정을 거친 트랜스젠더의 수조차 국가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 법적 성별 정정은 법원 판결과 지방자치단체의 가족관계등록부 변경 등의 절차를 거침에도 통계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연구진이 트랜스젠더 통계 부재를 ‘의지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이유다. 개명의 경우 몇 년 전부터 ‘호명’으로 사건 번호를 따로 분리해 한 해에 몇 명이 개명하고. 심지어 어떤 이름으로 많이 개명을 했는지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성별 정정은 ‘호기’(호적 기타)로 분류해 단순 오기나 외국인 귀화 등의 경우와 섞여서 다뤄진다.

문재인 정부는 트랜스젠더 인권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참여자의 87.0%(514명)은 “현 정부가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당시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2017년 대선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이슈가 사라졌다. 박 변호사는 “지난 6월 국회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지 반 년이 넘도록 청와대나 정부에서 어떤 공식적인 지지 반응도 없다”며 “오히려 5년마다 수립되는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있었던 ‘성소수자’ 목차를 빼버리는 등 후퇴한 부분도 있다”고 지적했다.

출처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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