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그녀의 가르침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멕시코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장영은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의 ‘벨벳 옷을 입은 자화상’ (1926·왼쪽)과 결혼식 초상화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1931·오른쪽).

프리다 칼로의 ‘벨벳 옷을 입은 자화상’ (1926·왼쪽)과 결혼식 초상화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1931·오른쪽).

“나는 미술 선생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고, 미술 선생이 된다는 생각도 없다. 나는 언제나 배우는 사람이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제대로 그린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기법을 제대로 익혀야 하고, 아주 엄격한 자기 수양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다.”

1922년,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했다. 2000여 명 가운데 여학생은 35명뿐이었다. 프리다 칼로는 의과대학 진학을 목표로 5년 과정에 등록한다. 여섯 살 되던 해인 1913년에 소아마비를 앓았던 프리다 칼로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예비학교는 역동적이었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의 여파가 예비학교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때는 진실의 시대, 신념의 시대, 열정의 시대, 고귀함의 시대, 진보의 시대. 천상에는 음악이 있고, 지상에는 칼날이 있던 시대였다. 우리는 행운아였다. 프리다를 포함해서 우리는 행운아였다.” 예비학교 학생들은 오직 수준 높은 지성과 완벽한 논리 앞에서만 고개를 숙였다.

동아리 ‘카추차스’가 단연 돋보였다. 프리다는 카추차스에 들어가 고전을 삼키듯 읽었다. “카추차스 회원들과 친구들은 누가 더 좋은 책을 찾아내는지, 그 책을 누가 먼저 읽는지 경쟁을 벌였으며, 때로는 자기들이 읽은 것을 각색하고 연기했다.” 다양한 분야의 고전을 섭렵하다 보니 프리다는 자연스럽게 스페인어, 영어, 독일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프리다는 훌륭한 의사가 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환자가 되었다.

1925년 9월 17일, 프리다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버스에 올라타고 얼마 후에 충돌이 일어났다. 다른 버스를 탔었는데, 내가 양산을 두고 와서 찾으러 가느라 내렸다. 그래서 망할 놈의 그 버스에 타게 된 것이다.” 전차와 버스가 충돌했고, 프리다 칼로의 몸이 부서졌다. 긴 수술 후, 프리다 칼로는 침대에 누워 석고 깁스 속에 갇혀 지내야 했다. 치료비는 천문학적이었다. 집안의 가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병상에서 프리다 칼로는 학교를 포기했다. “교통사고가 나의 진로를 비롯한 많은 것을 바꿔놓은 이래, 나는 세상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욕망을 채울 수 없었다. 채우지 못한 욕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는 것 같았다.” 프리다 칼로는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았다. 용기도 생겼다. 교육부 건물에 벽화 작업 중이던 디에고 리베라를 다짜고짜 찾아간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림의 전문가인 당신 의견을 듣고 싶어요. 허영심으로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습니다. 좋은 화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그것만 말해주세요. 제 작품 세 점을 가지고 왔어요.”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진보 진영을 규합하는 운동가로 이미 유명했던 디에고는 프리다의 그림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세 점의 그림 가운데 ‘벨벳 옷을 입은 자화상’(1926)은 매혹 그 자체였다. 디에고는 무서운 신인을 한눈에 알아봤다. 프리다에게 지금처럼 자신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그림을 꾸준히 그리면 반드시 화가로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한다. 사실 디에고의 조언이 없었다 할지라도 프리다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

3년 동안의 회복 기간을 거쳐 프리다는 1928년에 카추차스 회원들과 다시 만난다. 예비학교 졸업 후 다양한 전문 분야로 진출할 준비를 마친 친구들에게 조금도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은 대통령 선거운동과 대학 자율화 투쟁에 앞장섰다. 프리다는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친구들은 시위 현장을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프리다는 그들보다 더 많이 읽고 썼다.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늘 넓은 세상을 꿈꾼 그녀, 사랑만으로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서 엄청난 발전을 한다, 피카소도 ‘나보다 낫다’고 했으니…
22번의 수술을 하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하며 견뎌냈다
반전 평화운동에도 참여…죽기 직전 “인생만세”라는 글 남겨

이 무렵 프리다는 디에고와 사랑에 빠진다. 1910년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 멕시코로 돌아온 디에고는 1920년대 거대 벽화들을 연이어 완성하며 화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29년 8월,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디에고의 여성 편력과 거친 성격 및 특유의 오만함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유명했다. 프리다도 디에고의 결함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에고를 선택했다. 사랑만으로는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프리다는 오랜 시간 넓은 세상을 꿈꾸었다. 1925년 1월, 친구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에게 프리다는 미국행을 권유하며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멕시코에서 한평생을 보낸다면 우리는 영원히 무능한 사람으로 남고 말 거야. 내게는 여행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게 없어.” 예비학교 시절부터 프리다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싶었다. 병상에서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멕시코 밖에서의 삶을 꿈꾸었다. 프리다는 인생의 목표가 같은 사람을 만나 함께 성장하고 싶었다. 디에고가 적임자였다.

1930년, 프리다와 디에고는 미국으로 향한다.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디트로이트에서 프리다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다. 디에고도 크게 놀랐다. 디에고는 1932년 디트로이트 시절부터 프리다의 작품은 이미 자신을 훌쩍 뛰어넘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예술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걸작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4년부터 디에고와 가깝게 지냈던 피카소도 “드렝도 나도 당신도, 프리다 칼로가 그린 것 같은 머리는 못 그린다”는 편지를 디에고에게 보냈다.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 생활은 평범하지 않았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결혼 이후에도 새로운 사랑을 허용했다. 프리다는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펼치며 지적인 토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반겼다. 스탈린과 일전을 벌였던 트로츠키, 인물 사진의 새로운 지평을 연 니콜라스 머레이, 천재 조각가로 불린 이사무 노구치는 프리다의 지성과 열정에 매료되었다. 한편, 디에고는 아름다운 여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충동적이고 미숙했다. 동시에 프리다에게 집착했다. 프리다의 연인에게 권총으로 위협한 일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디에고는 이혼을 강요했다. 1939년 11월에 프리다와 디에고는 이혼한다. 디에고는 이내 무너졌다. 프리다를 다시 찾아온 디에고는 재결합을 애원했다. 1940년 12월, 프리다와 디에고는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프리다는 자신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하는 디에고를 동반자로 인정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했다. 프리다의 소망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되고 싶은 여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43년 프리다는 ‘라 에스메랄다’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만났다. “프리다의 위대한 가르침은 화가의 눈을 뛰어넘어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멕시코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프리다의 건강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오른발은 염증 재발로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요통도 나날이 심해졌다. 1950년 프리다는 오른발 절단 수술을 받았고,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 수술을 받은 후 또다시 9개월을 병상에서 머물러야 했다. “한 세기 분의 고통이 지속되었다,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그렇다고 마냥 운명 앞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프리다는 반전 평화운동 서명에 참여했고, 개인전을 준비했으며,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의 삶을 통틀어 22번의 외과 수술을 받았다.” 고통도 프리다를 이기지는 못했다.

세상을 떠나기 여드레 전에 그린 마지막 작품 ‘인생 만세’(1954·위)와 ‘작은 칼자국 몇 개’(1935-1936·아래).

세상을 떠나기 여드레 전에 그린 마지막 작품 ‘인생 만세’(1954·위)와 ‘작은 칼자국 몇 개’(1935-1936·아래).

1953년 4월, 멕시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리다의 작품전이 열렸다. “내 의지는 강하다. 내 의지는 변함이 없다.” 개막식 날 프리다는 구급차를 타고 전시장에 도착해 침대에 누워 친구들과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1년 3개월 후인 1954년 7월 13일, 프리다는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 프리다는 자기 작품에 짧은 인사를 남긴다. “인생 만세!” 스스로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었다. 쓰라렸던 자신의 삶에 보내는 찬사도 잊지 않았다. “나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프리다 칼로의 성취 앞에서 언제나 겸손해진다.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된다. 매번 큰 용기를 얻는다. 글 쓰는 여자는 사랑을 증명한다.

■ 필자 장영은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16)그녀의 가르침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멕시코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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