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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생산직 오퍼레이터로 일하던 김진영(46·가명)씨는 면역계 이상으로 온몸에 염증이 생기는 병인 루푸스로 지난해 3월 업무상재해를 인정받았다. 루푸스 진단을 받은 지 14년 만이고, 산업재해 급여를 신청한 지는 4년4개월 만이다. 직업병으로 인정받았다는 기쁨은 잠시였다. 근로복지공단의 황당한 휴업급여 지급 제한 판정 때문이다. 공단은 전체 산재인정 기간 2천741일(2011년 10월29일~2019년 4월30일) 중 통원치료한 날 76일만 휴업급여 지급일로 확정했다.

진영씨를 보살펴 온 친언니는 “2011년 이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자꾸 쓰러져 거동도 잘 하지 못했다”며 “요양원에 입소시키려 요양신청도 했는데 76일만 휴업급여를 지급받는 게 말이 되냐”고 울분을 터트렸다. 그는 “지난해 8월 근전도 검사에 대한 주치의 소견만으로 취업 가능 여부를 결정지은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김씨처럼 어렵사리 산재를 인정받고도 휴업급여 신청 과정에서 또 다른 벽에 부닥치는 재해자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산재승인과 요양기간 연장, 휴업급여 지급 결정 과정에서 주치의 소견서나 진료계획서가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데, 이를 객관화하기 위한 제도나 교육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산재 환자에 대한 의사의 지식과 인식이 낮은 상황”이라며 “산재 제도를 교육하고 사회보험으로서 산재 인식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도움 없인 화장실도 못 가는데…”

조승규 공인노무사(반올림)는 “김진영씨는 요양기간 초기인 2011년 10월쯤 입원 치료가 많았고, 2012년 8월에는 뇌경색이 왔다”며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 제한을 인정해 요양등급 3등급을 부여한 점을 고려할 때 해당 기간 취업 치료가 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당시 김씨는 혼자서는 세수를 하거나 화장실 이용도 어려워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김씨는 증세가 심해졌던 2006년부터 취업을 하지 못하고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아 왔다. 현재는 기초생활급여를 수급해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진영씨 주치의는 현재 증상을 중심으로 “저림증과 피부발진 소견으로 이들 증상은 불편하기는 하나 일상적인 활동이나 업무에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됨”이라고 의견을 냈고, 근로복지공단 부천지사는 주치의 소견을 근거로 통원치료한 76일에 대해서만 휴업급여 지급을 결정했다. 김씨와 재해자 가족은 공단의 결정에 불복해 산업재해보상보험심사위원회에 심사를 청구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김씨는 올해 8월 재심사를 청구했고, 산재보험재심사위원회에 주치의 소견을 다시 신청한 상태다.

이진우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 노동자건강증진센터장(직업환경의학전문의)은 “(김진영씨의 경우) 병세 회복 뒤 일상생활 가능과 취업치료 가능은 다른 의미인데 주치의들이 취업치료 가능을 과도하게 넓게 해석하는 데서 비롯된 문제”라고 설명했다.

진료계획서 작성 거부에 속앓이
“구걸하는 것 같아 병원 가기 싫어”

산재보험 제도 이해도가 낮은 탓에 의사들이 소견서·진료계획서 같은 서류 작성에 거부감을 표현하거나, 불성실하게 작성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2017년 비호지킨림프종 4기 진단을 받은 정선영(33·가명)씨는 이듬해 산재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주치의의 비협조로 산재급여 신청 과정에서 애를 먹었다.

2018년 8월 산재인정 전 혈액종양내과 주치의 ㄱ씨는 산재보험 소견서를 “한 번도 작성해 본 적 없다”는 이유로 지연 제출했고, 취업치료 가능 여부와 입·통원 예상기간 등 일부 항목은 기재하지 않았다. 주치의가 ㄴ씨로 바뀐 뒤에도 선영씨의 속앓이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 10월 비호지킨림프종이 재발해 요양기간 연장을 위해 치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하자 ‘취업치료 가능 여부’란도 아닌 ‘원직장 복귀 여부란’에 “현 상태에서 원직복귀가 가능하다”고 표기하면서다. 해당 서류에는 “원직복귀에 대한 재해자의 의사”를 표기하는 란도 있었지만 이 란은 미기재했다.

선영씨는 2005년 삼성디스플레이㈜ 탕정공장에 입사해 일했지만, 생리불순·하혈 등 건강이상을 겪으면서 2008년 퇴사했다. 정씨에게 12년 전 퇴사한 삼성디스플레이는 돌아갈 수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곳이다.

정씨는 “처음 진료했던 교수님도 그렇고 현재 진료 교수님도 산재 관련 서류 자체를 모르는 데다가 자기네가 왜 써 줘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며 “진료계획서 작성을 거부한 때는 서류 써 달라고 구걸하는 것 같아 병원에 가기 싫을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조승규 노무사는 “최근까지 항암치료를 받던 환자에게 교대제를 하고 있는 삼성디스플레이에 복귀하라고 하는 산재제도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란 말 외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비판했다.

“일터·산재 제도 이해도 낮은 주치의”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직업환경의학전문의)은 “원직복귀는 재해자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며 “당사자가 원직복귀를 희망한다는 것을 전제로 주치의가 가능과 불가능을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임상적 의견만으로 단편적으로 해당 사안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산재 요양이 승인된 재해자들에게 취업치료 가능 여부와 원직장 복귀 가능 여부 판단은 치료에 소요되는 의료 접근성을 포함해 다양한 사회적 자원의 접근성, 치료·재활, 재발방지를 위한 회사 내 편의·보조 시설 장비, 회사 내 지지 등이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진우 센터장은 “대부분 의사가 개별 근로자의 ‘일터’ 상황을 잘 모른다”며 “이에 대한 기초 교육이 의대 교육과정에 보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재 환자에 대한 의사들의 지식과 인식이 낮다”며 “의사연수교육 필수항목으로 추가해 산재 제도 교육이나 사회보험으로서 산재보험 인식 수준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휴업급여는 산재보험법상 취업하지 못한 때 지급하는데, 원직복직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장 취업, 자영업·생업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며 “어느 정도 노무를 제공할 수 있는 상태면 취업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일상생활할 때 불편함이 있을 수 있지만 단순한 업무라도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면 취업치료 가능 상태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주치의 소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부적으로 자문의사를 통해 취업치료가 가능한지 다시 자문을 받는 경우가 있고, 취업치료 가능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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