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등을 계기로 산업재해 예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동시에 산재노동자 보상·치료·사회복귀를 위한 산재보상보험제도 개선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산재처리 절차 개선과 산재보험 사각지대 해소 등 전문가들이 바라본 산재보상보험제도 개혁 과제를 6차례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 상임활동가)

산재보험 제도는 들여다보고 겪을수록 문제가 총체적이다. 몇 가지를 고쳐서 나아지지 않는다. 기본 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산재보험은 국가가 운영하는 사회보험이고 사회보장 제도다. 따라서 국가가 손해를 봐서라도 아픈 노동자의 치료받을 권리, 최소한의 유족 생존권을 위해 제 기능을 다해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산재사고가 정말 많이 발생하는 경우 산재보험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러나 산재보험은 건강보험만큼 사회보험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신속성이 떨어지는 문제와 보장받기 까다롭다는 것이다.

산재보험은 건강보험과 달리 ‘신청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노동자의 신청과 판정(사실상 재판)으로 산재승인이 결정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건강보험처럼 신속하게 치료비를 보장받지 못한다. 사업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고용구조 속에서 웬만큼 아프지 않고는 산재신청을 감행할 노동자는 많지 않다. 이는 산재은폐 문제로 직결된다. 특히 계약직·하청·이주노동자처럼 가장 많이 다치고 병드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은 일자리 위협 때문에 산재신청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신청주의의 한계다. 따라서 산재보험이 사회보험으로 거듭나려면 건강보험처럼 병원에서부터 자동 적용되게 해야 한다. ‘선 보장 후 정산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운영기관인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험 개혁으로 더 많은 노동자를 보호하자고 하면 보험재정을 걱정하며 선을 긋는다. 사회보험으로 거듭나려면 더 이상 보험재정 운운해서는 안 된다. 특히 기업에겐 산재보험 감면 혜택을 주면서 노동자에게는 보험재정을 걱정하며 보장을 해주지 못하니, 산재노동자는 생존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반올림에서 지난 14년간 문제제기해 왔던 반도체 등 첨단산업 직업성 암과 여러 직업병 피해는 지금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2017년 대법원이 첨단산업에서의 과학적 규명이 어려운 한계를 인정하며 인과관계 추정의 원칙을 강조했다. 특히 행정청의 조사부실과 사업주의 비협조 등 노동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인과관계를 밝히기 어렵다면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라고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 그럼에도 이후 법과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해, 공단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어떤 판정위원이 배정되느냐에 따라 판정 결과가 달라진다.

또한 역학조사를 포함한 재해조사 기간이 너무 길다. 산재인정까지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실정이다. 반복되는 반도체 백혈병·뇌종양 등 산재인정 상병에 대해서 또다시 긴 조사와 까다로운 판정을 거치는 것은 잘못된 행정이다. 반복되는 산재는 판정 없이 인정되도록 해야 한다.

산재인정 이후에도 문제가 많다. 보장성 문제가 가장 크다. 요양급여뿐 아니라 휴업급여·장해급여 등을 받기 위해서는 근로복지공단에 다시 신청과 증빙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제법 복잡하고 까다로워 공인노무사를 찾거나 혼자서 감당이 안 돼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산재보험이 사회보장 제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가 생략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치료받는 기간 동안 휴업급여 등 보험급여 지급이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산재를 당했다는 이유로 빈곤과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산재 불승인 처분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에 심사청구를 제기하거나 노동부에 재심사청구를 제기할 수 있지만 권리구제가 거의 되지 않는다. 지난 14년간 반도체 노동자 직업성 암 등 산재신청 사건에 대해서는 정말 단 1건도 심사·재심사에서 구제받은 적이 없다. 같은 조건에서 법원은 대부분의 사건을 구제하고 노동자 입증책임을 대폭 완화하는 판결을 내리는데 정작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 산하 심사·재심사 기구는 구제를 못하는 것이다. 심사·재심사 기구에 대한 면밀한 평가와 제도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근로복지공단 심사위원회는 기초적인 검토부실로 명백한 보험급여 부지급 오류조차 바로잡지 못하는 판정을 반복하고 있다. 심지어 제출한 증빙서류마저 이유 없이 누락된다는 피해자들의 호소도 적지 않다. 이 정도라면 업무감사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노동자 권리구제를 못하는 심사위에 대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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