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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2세 직업병 피해자 3명 집단 산재신청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지난 20일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2세 직업병 피해자 3명 집단 산재신청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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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9일, 의료연대본부가 10여 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투쟁해 온 결과 태아 산재가 대법원으로부터 처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제주의료원 태아산재사건은 2009년 항암 약을 조제하던, 임신한 제주의료원 간호사 12명 중 5명은 유산하고, 태어난 아기 7명 중 4명의 아기는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일입니다. 미국 식품의약처에서 기형아 발생을 이유로 임산부에게 금지한 약물을 제주의료원에서는 임신한 간호사들이 다루었습니다.

2016년 진행된 2심에서 유산의 경우 산재가 인정되었지만 살아남아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게 된 아이들은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선천성 질환과 엄마인 여성 노동자의 업무상 인과관계가 밝혀졌음에도 불과하고, 법원에서는 자녀가 산재보험급여 청구권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태아는 모체인 엄마와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그런 판단을 한 것입니다. '태아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산재보상보험법의 수급자가 될 수 없'고, '근로자 본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쟁점이 되고 시간도 오래 걸렸습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10여년 넘는 법정 싸움이 또 다른 노동자들에게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울고등법원이 태아산재를 부정한 판결의 근거인 산재보상보험법의 시급한 개정이 필요합니다.

대법원판결이 나오기까지 당사자인 간호사 조합원들은 아픈 아이를 들춰 업고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업무 연관성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 내야 했습니다. 태아 산재 판결은 다른 사업장에도 분명히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많은 부담감과 책임감을 가지며 투쟁했습니다. 지리한 법적 공방, 사회적 여론화를 위한 토론회, 기자회견, 여성가족부 장관 면담 등 수많은 투쟁을 해온 것입니다.

"임신한 노동자의 업무 수행으로 발생한 태아의 건강 손상은 산재보험법상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와서 산재보상법 개정이 탄력을 받아 진행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투쟁 과정을 거친 대법원판결이었기에 산재보상법 개정도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프면 정부와 회사, 사회가 책임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반도체 노동자 2세 직업병 피해자 3명 집단 산재신청 기자회견에서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이향춘 본부장이 제주의료원 태아산재 투쟁 경과 및 현재 상황을 발언했습니다.
 반도체 노동자 2세 직업병 피해자 3명 집단 산재신청 기자회견에서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이향춘 본부장이 제주의료원 태아산재 투쟁 경과 및 현재 상황을 발언했습니다.
ⓒ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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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의 투쟁을 통해 산재로 인정 되었지만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은 아직까지 보험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현재 법에는 2세 산재 경우 급여를 어떻게 지급할지에 대한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보호의무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한 대법원의 판결이 있지만 법을 개정해야 할 국회와 정부는 후속 과제인 산재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1년 동안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근로자 본인'의 부상·질병·장해·사망뿐만이 아니라 부모의 업무상 재해로 영향을 받은 태아의 건강손상까지 포괄하도록 산재보상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제주의료원 태아산재 사건은 계속 논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식독성 위험이 있는 화학물질이 다양하게 보고되고 있는 반도체·전자산업 공장에서도 자녀가 '2세 질환'을 안고 태어나는 일이 빈번합니다. 2018년 11월 삼성전자-반올림 중재안에 '2세 질환'에 대한 보상이 포함된 뒤 4개월 동안 반도체 공장 노동자 자녀들의 2세 질환 의심 제보가 19건이나 들어왔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2세 질환 문제 제보는 해가 거듭될수록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법원판결 이후 박주민 의원을 비롯한 여러 의원이 산재보상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자신의 업무로 인해 아픈 아이를 두고 법적 다툼을 해야 할 노동자가 이제는 없었으면 합니다. '태아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산재보상보험법의 수급자가 될 수 없다'는 현실에 뒤떨어진 산재보상법이 개정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합니다.

우리는 무모한 도전을 합니다. 산재보상법이 바뀌지 않아 반올림의 산재 신청이 불승인될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주저하지 않고 나섭니다. 이번에 세 명이 반도체 노동자의 2세 직업병 피해를 호소하며 산재신청에 나서지만 세 명의 일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주의료원 태아 산재 투쟁을 10년 동안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누군가가 힘들게 결단하고 나섰고, 새로운 길을 만드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며 나선 길이 가족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 된 노동자가 한해 2000명이 넘는 대한민국에서, 업무 연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산재조차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이 사회에서 업무로 인해 건강손상을 입은 2세들이 보호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제주의료원 태아산재는 대법원 판결 이후로 달라진 게 없기에 지금도 투쟁 중입니다. 의료연대본부는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죽지 않는 현장,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현장, 아프기 전에 대비하고, 생식독성물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주고, 아프면 정부와 회사, 사회가 책임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투쟁을 이어갈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이향춘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본부장입니다.


태그:#태아산재`, #반도체2세직업병, #생식독성물질, #공공운수노조,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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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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