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십여 년을 살 적에는 이방인을 자처했다. 언제 떠나도 아쉽지 않다는 듯 낯설게 대하고 싶었다. 그런데 제주는 좀 달랐다. 첫 퇴근 후 버스 정류장에 서서 매서운 밤 풍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곳에 터를 잡아야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들었다. 반짝이는 서울의 밤 풍경은 늘 나를 가난하게 했지만 스스로 길을 밝혀야 밤길이 열리는 제주는 나를 움직이게 했다. 입도 첫 주말, 토요일 오전에 집 두 채를 보고선 살 집을 낙점해 그날 오후 배낭만 메고 들어갔고, 동생 차를 중고로 구매했다. 거주지와 교통편을 한 번에 해결하고 나니 실소가 터졌다. 선택 과부하에 걸릴 정도로 숱한 고민을 거듭해 무언가를 결정하는 내가 이토록 빠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니, 이것은 생존을 넘어 존립에 가깝다 할 수 있겠다.

제주에서의 첫 주말은 ‘방콕’이었으나 집에 들어앉아 제주인의 삶을 깨쳤다. 제주에서 집을 구할 요량이라면 ‘직방’이니 ‘다방’이니 하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는 건 시간 낭비다. 많은 매물을 보고 비교 분석하고 싶다면 ‘제주교차로’ 홈페이지를 통하거나 직접 발품 파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걸 몰라 직방 매물을 덥석 물었지. 월세금이 서울 못지않았지만, 매물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부엌과 분리된 1.5룸에, 앞에는 감귤밭이 있고 그 너머로는 바다가 있다. 서향으로 난 테라스에는 산방산이 있으며 저녁 무렵이면 환상적인 노을 뷰를 자랑한다. ‘그래, 내가 이 풍경에 홀딱 빠져 계약했지!’ 싶어 바깥을 찬찬히 뜯어보는데, 감귤밭 안에 웬 언덕 같은 것이 보이는 게 아닌가? 설마 싶었는데 무덤이다. 그것도 세 채나. 검색해보니 제주인의 풍습 중 하나로 밭에 묘지를 세우면 조상이 돌봐준다고 여긴단다. 부지런히 농사짓다 가신 분들이라 생각하니 놀란 마음이 조금 따뜻해진다.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동네 구경에 나서는데 매콤한 연기가 코를 자극한다. 낡은 드럼 앞에 선 아저씨가 무언가를 넣으며 막대기로 휘저으니 불길이 치솟는다. 쓰레기를 태우고 있었다. ‘집 앞에 두면 쓰레기 수거차가 와서 가져갈 텐데, 왜 저런 고생을 사서 하지?’ 그렇다. 육지 것의 의문에는 제주인의 명분이 존재한다. 쓰레기 수거차는 골목을 누비지 않고, 클린하우스는 재활용품 요일별 배출제를 시행하고 있어 온갖 쓰레기를 같은 날 버릴 수 없다. 그러니 쓰레기를 직접 태워 없애는 쪽을 택한 것. 다른 방법이 없을지 건물주에게 물으니 ‘재활용 도움센터’를 이용하란다. 일반 쓰레기는 물론 재활용품을 분리해 배출할 수 있고, 상시 운영이라 쓰레기를 집 안에 쟁여둘 필요가 없다.

육지인과 제주인의 생활 습성이 놀랍도록 다르다는 걸 실감한 후 저녁을 맞이했다. 역시나 세상이 온통 까맣다. 여행자일 때부터 겨울이면 제주 시골에 있는 웬만한 가게들은 저녁 6시에 문 닫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제주의 겨울밤은 일찍 찾아오고, 유독 길다. 기나긴 밤을 알뜰히 써야겠다 싶어 무얼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서울에서는 이 시간에 뭘 했더라?’ 친구나 동료를 만나 오랜 이야기를 반복하고, 하릴없이 쇼핑을 다녔다. 소모했고, 허비했다. 어쩐지 예전의 내가 조금 가여웠다. 건강한 저녁을 맞이하는 법을 몰라 나를 갉아먹었구나. 어수선한 불빛을 걷고 나니 내게 집중하게 됐다. 식물을 돌보고, 다음날 먹을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며 스트레칭한다. 좋아하는 향을 피우고 책을 읽으며 그날 나를 즐겁게 했던 한순간을 기록한다. 여전히 이 밤을 어떻게 나야 할지 모르겠으나 나와 조금 더 친밀해졌다는 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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